생산자 Creator

0024, 윤석우

분류번호
0024

이름
윤석우 (尹錫祐)

생년월일
1942-2015

1966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졸업

1965 종합건축설계사무소 입소

1972 건축사 국가고시 합격, 1급 건축사

1979 기술사 시공부문 합격, 건축시공기술사

1986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대한건축사협회 서울지부 간사

1995 건축대전 초대 작가, 대한건축사협회 이사

1996 미국(AIA) 및 일본(JIA) 건축가협회 명예회원

1997-2014 ㈜종합건축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 역임

종합건축 35년의 장정
한 나라의 역사는 무한한 의미를 내재한 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꼬리를 길게 늘어뜨려 가고 있다. 근대 이후 우리나라는 민족의 존폐 위기를 몇 번이고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고 그 과정에서 정신적, 문화적인 많은 아픔을 맞아야 했지만 우리의 맥(脈)만은 잃지 않고 꾸준히 이어 왔다. 국내 건축의 역사도 근대 이후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과거의 전통건축과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변화되어 왔다. 근대화의 태동기에 일제에 의해 이식되어온 이질적이면서도 세계의 여러 나라보다 뒤늦은 신건축문화가 생겨났고 해방과 6.25이후는 폐허의 복구와 무분별한 수용이 만연하던 시대였다. 종합건축은 이러한 혼란시대인 1953년 9월 7일 종합건축연구소라는 명칭으로 개설되어 단일 설계사무소로서 보기 드문 긴 역사를 형성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설 당시 우리의 건축은 인식 부재의 상황 하에서 전쟁 복구에 바빴고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한 관청과 업무용 건물에 대처해야 할 때였으나 근대주의에 대한 수입과 이해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더불어 강철 빔의 사용, PC공법, 장스팬의 해결, 고층 건물의 축조 등은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고(당시 미국에서는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의 〈레이크 쇼어 드라이브 하우징〉(Lake Shore Drive Apartments) 등의 고층 건물이 극에 달하고 일부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내용까지 언급되었다) RC건물도 미약했으며 설계사무소도 별로 없던 때였던 만큼 종합의 탄생은 우리 건축계에서 여러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종합건축 태동의 결정적 계기는 당시 서울공대(경성고공) 건축과 출신의 작업실 및 연구실의 필요성을 느낀 고 김정수 선생과 일제 치하, 해방, 6.25동란 등의 악조건 하에서도 많은 건축 활동을 해오던 이천승 선생과의 의견이 합일되어 종로 YMCA 건물 맞은편 영보빌딩 1층에서 설계업무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우리 건축계의 유능한 건축인을 대거 영입하여(현 건축설계분야의 많은 분들이 종합과의 인연을 갖고 있음) 근대-현대를 이어오는 한국건축의 메카로서 자리굳힘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만큼 1950년대 이후 우리 건축의 발전과정을, 그리고 역사적 자료를 널리 공개하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생각된다. 본고에서 우리 건축의 발전과정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로써 종합건축을 통해 그 뿌리를 찾고 앞으로의 발판을 재구축하는데 필요한 계보를 형성코자 한다.

종합건축 설립이전의 시대적 상황
세계각국의 예술 및 건축분야에 근대화 운동이 이루어지는 동안 우리는 쇄국정치 등으로 서구 문물의 인입이 금지되고, 일제 치하에서는 순수한 합리주의적 모더니즘이 아닌 양식적인 모방의 범주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1920-30년경부터 한국건축가의 인맥이 서서히 형성되면서 그동안의 무분별한 르네상스풍, 고딕풍(영사관, 일제관청, 성당, 교회 등)의 양식적인 건축 활동에 합리주의 정신이 가미되기 시작한다. 즉, 장식적인 소지를 제거한 순수한 기능주의 건축이 나타나고 1919년 경성고공을 졸업한 박길룡 선생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우리 건축사에 활발하고 탁월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조선생명보험〉(1930), 〈경성제대본관〉(현 문예진흥원, 1931), 〈한청빌딩〉(1935), 〈화신백화점〉(1937) 등과 삼청동, 돈암동 등에 많은 한식주택을 설계하면서 한국인 건축가와의 협조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이천승 선생도 초창기에 박길룡 선생의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의 활동은 근대건축의 신공법 등에 미치지 못하고 건축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다. 해방이 되면서 좌·우익의 이념적 대립, 민족의 분열, 6.25동란 등으로 우리의 건축은 약 10년간 정체기에 놓이게 되었으며 1950년 이후 서서히 활동을 재개하게 되었다.

종합건축의 탄생 (1953)
일제 치하에서의 건축 활동은 그 무대가 매우 제한되어 있었고 건축과 출신은 총독부나 관청이 아니면 취직할 길이 없었다. 더구나 총독부에 들어가는 문은 극히 좁았고 대부분의 큰 건물은 일인의 손으로 설계되던 상황이었으므로 한국인이 성장할 기회는 매우 적었다. 전후 우리의 인력과 기술진이 요구되기 시작할 즈음 체계적인 설계업무 수행과 후진 양성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김정수, 이천승 선생은 미국 미네소타 대학의 교환교수를 다녀온 최종환, 지철근, 윤정섭 교수 및 이휴선, 강진성, 이승우(운영진)와 이균상 선생(고문), 박인준 선생(고문)의 구성 체제를 수립하여 종합건축 시대의 막을 올렸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에서최초로 신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에 의해 건축 활동이 시작되는 단계였으므로 종합의 개설은 설계사무소로서 선구적인 역할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초창기 우리의건축 현실은 설계 방법이나 시공재료 등의 미비로 인하여 하나의 건물을 형성함에 있어 필요한 것들을 개발해서 사용해야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천승, 김정수 선생은 어려운 상황하에서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작품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이며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경주했다. 이때의 정열과 분위기가 지금까지 종합이 굳건히 존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설립초기의 활동
1956년 이후 1968년까지 16년간의 사무소 소재지는 이천승 선생이 설계한 종로의 영보빌딩(멸실) 1층에 위치해 있었다. 초기 몇 년간은 전후 피해 복구에 여념이 없었고 그 후 많은 건물들을 설계하면서 우리 건축사에 이벤트가 될 만한 작품들을 상당수 남겼다. 국내 최초로 쇼핑몰의 개념을 구체화한 〈신신백화점〉(1956), 알루미늄 커튼월을 처음 도입, 실현한 〈명동성모병원〉(1958), 〈YMCA 본관〉(1960)이 그러하며 〈장충체육관〉은 80m라는 긴 스팬에 도전한 것으로써 이 작품들은 미지에 대한 탐구와 도전 의식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업적이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신재료의 개발과 신공법의 실현, 대형 건물의 설계 등은 건축계의 큰 관심사였고 설계사무소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선두주자가 되어야 했다. 어느 분야에서든 개척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힘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노력과 땀이 결실을 맺을 때 느끼는 만족감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매력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김정수 선생은 작은 재료 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여 당시 국내에 보급되어 있지 않은 것은 직접 제작하고 그 성능을 시험하며 사용하였다.
또한 공동경영자인 이승우 선생은 육사에서 구조역학을 강의한 경험을 살려 건물 하나하나에 완벽한 안정성을 부여해 나감으로써 종합건축이 긴 항해를 시작하는 초석을 다졌으며, 송종석, 안영배 선생의 공동보조에 힘입어 당시 국내의 많은 현상설계에 당선되는 개가를 올렸다. 그 당시 대표적인 현상안은 〈남대문 교회〉(1954, 1등, 2등 당선), 〈이화여자대학교 강당 현상설계〉(1955, 1등 당선), 〈공군본부청사〉(1956, 1등 당선), 〈이화여자대학교 교사〉(1957, 1등 당선), 〈종부종합청사〉(1967, 1등 당선) 등이 있었다. 이러한 작품들이이루어지기까지 그 이면에서는 설립초기부터 중요시한 팀워크가 매우 큰 힘을 발휘했을 것이며 이러한 가운데 축적되기 시작한 노하우가 후일 대규모 작품을 소화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즉, 구조적인 안정성에 바탕을 둔 균형 있는 매스의 이미지를 연출하는 종합의 특징이 35년이 지난 오늘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그동안 축적된 노하우, 그리고 무언중에 형성되는 맥(脈)과 작가정신과 더불어 현 이승우 사장 체제가 그만큼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낙원동에 이르기까지
어려운 상황 하에서 진행된 초기의 작품 활동을 거쳐 1960년대 후반부터 성숙되어지는 면모를 보여주는 기간이다. 16년의 종로 생활에 이어 명동으로 사무실을 옮기면서 많은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국내의 경제적 성장도 그 기반을 착실히 다지고 있던 때였으므로 건축 활동도 다소 안정된 상태에서 진행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주요 작품은 〈한국자동차보험〉(1969), 〈종합교통센타〉(1970), 〈ASPAC 문화센터〉(1970), 〈한국과학원 전체계획〉(1971),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1972), 〈울산공대 도서관〉(1972), 〈국회의장공관〉(1973), 〈서부역사〉(1973), 〈서울대학교 실내체육관〉(1973), 〈제2정부종합청사〉(1974), 〈미즈백화점〉(1975), 〈한국증권거래소〉(1975), 〈재외공무원자녀 기숙사〉(1977), 〈신라호텔 영빈관〉(1977), 〈사우디리야드 스쿨〉(1977) 등을 들 수 있다.
위와 같은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점은 초기의 안정된 형태에서 그 기조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디자인 기법을 가미하고자 애쓴 흔적인데 그 배경에는 치프를 중심으로 한 팀 별로 자유로운 의견을 수렴하여 작품에 임한 결과인 동시에 이승우 사장, 윤석우 소장, 유경철 소장의 공동경영 체제가 이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인 시각으로는 이 시기의 작품에서도 종합의 어휘가 지속되는 단계로 인식할 수 있는 바 이는 오랜 전통으로 다져진 종합의 작품 성향이 은연중에 표출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종합의 구성원들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분위기에 몰입되어서 얼마의 기간이 지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종합인이 되어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결국 20여년이 지난 1970년대까지 많은 건축인들이 종합을 거쳐 나갔고 구성원의 세대교체도 많았지만 그 맥은 연연히 이어지고 완성되어왔다.
이 기간의 현상 당선작 중 〈한국증권거래소〉는 우리나라 현상설계의 새로운 이벤트를 제시할 만큼 꽤나 세인의 논란이 있었던 작품으로 여의도라는 특수한 지역과 증권시장이라는 기능 및 고층 오피스 빌딩과의 매치라는 점에서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견해 차이를 가져왔으나 오늘날까지 여의도 증권가의 중심지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또한 〈한국과학원 마스터 플랜〉은 명쾌한 공간의 분리와 유기적 결합 및 각 건물이 공통적으로 철근 콘크리트의 가소성을 표출하면서도 지루하거나 단조롭지 않게 처리되어 있는 점 등은 당시 건축계의 귀감이 되었다. 모서리에 묵직한 코어를 만들고 콘크리트 수직루버를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빛에 의한 음영효과까지 감안한 작품으로 극히 “종합”적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낙원동 신사옥에서의 활동
1978년 이후는 낙원동에 새로운 사옥을 지어 이전하면서 젊은 건축학도를 대거 영입하여 이승우 사장, 윤석우 소장, 유경철 소장의 체제를 구축하면서 35년의 역사에 성숙된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작품의 스케일도 커지고 시대적인 여건도 초창기보다는 비교도 안될 만큼 달라졌다. 서울은 국제도시로 부상하고 거기에 따른 각종 시설물도 국제화의 물결을 타면서 도시재개발, 대형 고층건물의 출현, 대단위 아파트 단지조성 등 변신을 위한 노력의 흔적이 나타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건축가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작품성에 대한 논란도 여느 때보다 많았던 만큼 설계에 일하는 구성원의 자세는 사뭇 진지했다. 이 기간에 완성된 주요 작품은 〈삼화빌딩〉(1978), 〈충남대학교 중앙도서관〉(1979), 〈국무총리공관〉(1979), 〈서울역 개발계획〉(1979), 〈서울대학교 강당 현상설계〉(1980), 〈고려대학교 과학도서관〉(1981), 〈대한재보험사옥〉(1981), 〈한국증권금융사옥〉(1981), 〈국립중앙박물관〉(1982), 〈국회도서관〉(1982), 〈한일은행 전산센터〉(1983), 〈산업은행 현상설계〉(1983), 〈조폐공사본사 및 조폐창〉(1985), 〈목동청소년회관〉(1986), 〈청소년문화센터〉(1987), 〈국립전주박물관〉(1987), 〈한흥증권사옥〉(1987), 〈강원대학교 강당〉(1987), 〈고려대학교 기숙사〉(1987), 〈부산상록회관〉(1988), 〈국민투자신탁본점〉(1988), 〈백제역사관〉(1988) 등을 꼽을 수 있다.
지난 10여 년간에 완성한 이 작품들은 현 종합건축을 리드하는 중견그룹에 의해 설계된 것으로써 그 성격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즉, 급속도로 과학화되어 가는 작업과정과 디자인 방법론을 적용하면서 현대건축이 표현하고자 하는 상징성과 편이성을 부여한 것이다. 특히 규모가 커지고 특수한 기능을 요구하는 건물이 많아짐에 따라 적절한 노하우가 필요했었고, 이것을 해결하는 데에는 단순한 지식만이 아닌 경험과 역사가 절대적인 힘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낙원동 사옥은 70년대 후반 이후 종합인의 요람이 되어온 곳으로써 선배 건축가의 펜을 이어받은 50여명의 종합인이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창조를 위해 이곳에서 주야로 불을 밝히고 있다. 우리의 한국 건축이 이제 세계와 어깨를 견주는 시대를 맞아 그동안 우리 건축사의 선두주자가 되어온 종합건축의 35년에 이은 맥은 한국 근대 건축의 중요한 흐름을 파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계열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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