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자 Creator

0008, 김중업

분류번호
0008

이름
김중업 (金重業)

생년월일
1922-1988

출생지
평양

1939.03.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1941.12. 일본 요코하마 관립 고등공업학교 건축과 졸업 (현, 요코하마국립대학교 공학부 건축공학과)

1942.01. 일본 동경 마츠타-히라타 건축설계사무소 근무

1945.02. 조선주택영단 기수

1947.04. 서울대학교 전임강사 공과대학 근무
대한건축학회 연구부장

1949.04. 서울대학교 조교수 공과대학 및 사범대학 근무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겸 이화대학교 미술대학 강사 및
숙명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강사

1952.09. 이태리 베니스시에서 개최한 UNESCO주최, 제1회 국제예술가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1952.10. 프랑스 파리시 르 꼬르뷰지에 건축연구소에서 만 3년 6개월 간 건축 및 도시계획 전공

1953.08. 제9회 국제예술가회의 프랑스 청년대표자격으로 참석

1956.03. 귀국 후 김중업건축연구소 개소

1922-1943
192239일 평양에서 연안 김 씨 가문의 부친 김영필과 모친 이영자의 5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군수인 부친의 임지를 따라 강동, 중화, 성천으로 유년시절을 지냈고, 평양에 있는 결림국민학교를 마치고 평양고보에 진학하였다.
동경미술학교 출신 그림교사의 조언에 따라 건축을 전공하기로 하고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현 요코하마국립대학 공학부) 건축학과에 진학하였다. 파리 미술대학 그로몰 교수의 수제자인 나까무라 준페이中村順平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194112월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0년 선배인 사까모또 도시오의 이끎으로 당시 일본에서 대형사무소였던 마쯔라 히라타松田平田 건축사무소에 입소하여 3년간의 실무훈련에서 계획부터 상세도까지 모든 건축과정을 배웠다. 1942512일 서문여고를 졸업한 김병례와 평양에서 결혼하고 동경에서 생활을 이어갔다.

1944-1951
1944년 서울에 있는 조선주택영단 기사로서 이사장 직속으로 특수주택설계에 전념한다. 1945년 안양에 있던 조선비행기제작주식회사로 옮기고 곧 헌병대사건에 연좌되어 중화에 은신 중 해방이 되다. 해방 후 수개월간 처의 모교인 서문여고에서 기하학을 가르치다. 1946년 봄 단신 월남하여 미군공사 설계를 맡아 바쁜 시간을 보내다. 서울공대 전임강사가 되어 건축학과 도시계획을 가르치다. 동시에 서울사대에서 주택학을 강의하다. 그 시절 서울공대 내의 별명이 울트라 아이디얼리스트였으며, 서울사대에서는 봇쨩(어린애)으로 불리다. 가족 일부가 월남하여 마포에 정착한다. 이 시절 시를 썼고, 김광섭, 모윤숙, 이헌구, 김환기, 유치진, 서항석, 송지영, 구상, 특히 오상순, 변영로, 최현배 제씨의 사랑을 받았다. 1.4후퇴로 부산에 피난, 갑작스럽게 늘어난 가족들의 생계유지 때문에 서울공대, 서울사대, 한양대학, 이화여대, 숙명여대, 부산공업학교에서 시간을 쪼개어 가르친다. 그곳에서 만난 이중섭, 유강렬, 조동화, 최은희 등과 밤에 어울리다.

1952-1955
19527, 문총의 추천으로 김말봉, 김소운, 오영진, 윤효중과 같이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유네스코 주최 제1회 세계예술가회의에 한국대표로 유럽에 첫발을 디딤. 베니스영화제, 비엔날레미술제 등이 동시에 열리고,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찬란하였다. 오영진은 나의 길눈이 밝음에 언제 와 봤느냐고 물었고, 윤효중은 무슨 일에나 나를 앞세우기를 좋아했고, 그러므로 대표 스피치는 영락없이 연소한 내가 해야 했다. 단상에서 바르르 떨며 상기된 나의 모습이 가관이어서, 그날 저녁 파티에서 덴마크의 대시인 한스 씨도로프 페더슨이 태양의 아들이라 명명하여 좌중을 웃기는 촌극까지 벌였다. 내용인즉 국제저작권 문제였는데, 구텐베르크의 활자 발명보다 200년 앞선 우리나라에서는 판본의 붓수를 엄격히 규제하여, 활판이나 목판 모두 폐판하였기에 세계에서 저작권이 가장 존중된 전통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곳 의장단의 한 분으로 와 계시던 당대의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를 뵙게 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하늘의 별따기보다 힘들다는 그의 연구소에서 4년을 그와 함께 작업하게 된다. 60대의 원숙기에 깎고 닦아 만드신 만년의 대표작들인 샹디가르의 국회의사당, 정부청사, 고등법원, 낭뜨아파트, 롱샹예배당 등을 밤새워 그리고 지우고 야단맞고, 물고 늘어지는 엄청난 시간들의 축적이 나를 크게 성장시켜 주었다. 하루 20시간에 가까운 작업들의 연속이었다. 1953년 여름 세계건축가회의가 남불 엑스 앙 프로방스에서 열렸고, 휴전 소식을 접하다. 이곳에서 덴마크의 우존, 스웨덴의 스벨 펜과 같이 남불을 돌며 토로네 수도원의 간결한 조형미에 로마네스크의 얼을 만끽하다. 1954년 여름 이탈리아의 카사벨라 편집장인 건축가 에르네스트 로제와 같이 핀란드의 알바 알토 교수의 초청으로 주구 및 북구를 돌다. 오우루우 도시계획의 주임건축가가 될 것을 간청받고 돌아와 그 뜻을 르 꼬르뷔지에에게 전하여 크게 노여움을 산다. 19563월에야 겨우 귀국한다.

1956-1961
1956년에서 71년까지의 15년 동안 미친 듯이 작업에 몰두한다. 윤효중과 김환기의 강청에 홍익대학 강단에 섬과 동시에 김중업건축연구소를 꾸며 부산대학 본관, 명보극장, 건국대학교 도서관 등의 작업을 하다. 1957년 중앙공보관에서 제1회 작품전을 갖다. 프랑스 시절의 작품인 밀바의 집, 살고 싶은 집, 필그림 홀 등을 선보였다. 경주국립공원 전체계획, 경복궁 복구계획, 인천 해무청사, 묵호 해무청사 등을 세웠다. 1958년 서강대학 전체계획, 본관 설계, 숭실대학 본관계획, 서울 힐튼호텔 계획, 프린스호텔 계획, 최이혁 씨 댁, ㅅ자집 등을 설계했다. 서울에 와 있는 한국대사들과 어울려 왕립아세아협회 일을 돕기도 한다. 장준하, 김준엽, 조동화, 한운사, 조지훈, 조동필 등과 사귀다.
1959년 주한프랑스대사 샹바르가 서울에 세워질 주한프랑스대사관의 안을 청하기에 5월 미국원자력위원회의 안내로 원자력 시설을 사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뉴욕 브로드웨이에 있는 에디슨호텔 709호실에서 5일간 깔끔한 안을 짜다. 원자력연구소 농업진흥원 본관 등이 꾸며지면서 이 안이 무르익어 드골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본 설계에 돌입한다. 1960년에 착공되어 다음해 준공된다. 서소문 언덕 위에 우리의 얼을 깊이 심어 심금을 울려 보려는 의욕적인 작품이었다. 밤에 불빛에 비친 사뿐한 지붕이 서울 하늘에 아릿한 꿈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70년대 외국에 머무는 동안 이 건물은 추악한 몰골로 바뀌었으니 아쉬운 일이다. 1960년엔 설원식 씨가 청평빌라, 법학원 청사, 워싱턴 공원에 세워질 한국 종각 등 여러 프로젝트 속에 묻혀 바빴다. 4·19의 열기 속에 4·19기념탑 추진을 위하여 불려다니다. 조각가 차근호가 아깝게도 자살했고. 1961년에 접어들면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군인아파트를 2주만에 설계해야 하는 곤욕도 치르다.

1962-
19627월 시애틀에서 열린 유엔 주최 세계국립공원회의에 한국 대표로 지명되어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세아재단 후원으로 미국의 여러 건축가들과 친교를 맺다. 뉴욕에서 필립 존슨, 아이엠 페이, SOM의 반 샤프트 등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만났지만, 필라델피아에서 루이스 칸을 만나 백년지기가 되고, 그가 작고할 때까지 친교는 계속되었다. 파리에서 르 꼬르뷔지에 선생과 재회하여 한없는 기쁨을 나누었는데, 아깝게도 3년 후에 익사하고 말았다. 1959년에 하바드에서 지그프리드 기디온을 만났는데, 꼬르뷔지에 선생께서 내가 자살했다고 말씀하셨다 한다. 그래서 후에 선생을 만나 나무랐더니 껄껄 웃으시면서 나의 간청을 뿌리치고 자그마한 보잘 것 없는 나라에 돌아간 일이 자살행위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되물으시며, “주한 프랑스대사관은 장한 일을 해냈구먼하시면서 방에 걸어 두셨던 모듈판화의 오리지널에 싸인해 주셨다. 이 해에 서울시문화상을 받았다. 문화재위원으로서 석굴암 보수문제로 의견이 대립되어 사퇴하고 만다.

1963-1974
1963년에서 1970년까지 나의 전반기의 작업들이 뒤이어 간다. 제주대학본관, 서병준 산부인과, 유엔묘지 정문, 이탈리아대사관저 (현재의 한국미술관), 진해해군공관, 3·1로빌딩 등이 그것이다. 보람 있는 일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파트문제를 물고 늘어졌던 나는 와우아파트의 붕괴로 오히려 관재를 입고, 도적촌 사건을 다룬 글로 필화를 입었다. 마침내는 성남시(당시 광주)의 정책을 공개비판 했다는 누명으로, 197111월에 3개월 여권으로 프랑스로 출국 당했다. 서둘러 10월에 신세계 화랑에서 그동안의 작품과 프랑스 정부가 만든 <건축가 김중업>이라는 영화를 공개했다. 1965년 드골대통령에게서 주한 프랑스대사관의 설계로 프랑스 국가공로훈장과 슈발리에 칭호와 함께 받은 연금으로 이 영화는 제작된 것이다.
타의에 의한 외국생활이란 편할 리 없었다. 3·1로빌딩의 설계비는 받지도 못했는데도 엄청난 세금이 부과되어 성북동 집과 애써 모은 석물(石物)들이 몽땅 남의 손에 넘어가고 빈손으로 찾아온 파리의 생활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앙드레 말로가 나의 작업을 높이 평가해 주었기에 문화성 촉탁으로 가끔 도우며, 페르 앙 따르드노아(파리에서 100킬로 거리)라는 아름다운 시골의 숲속에서 책에 파묻혀 살았다. 집사람이 나의 간병 명목으로 찾아왔다. 그때 나는 무국적 상태(패스포트 기간 만료)였고, 프랑스 영구거주중 하나밖에 없으니 어느 나라도 찾아 나설 수가 없었다.
이때의 작품이 성공회회관, 홍명조씨댁, 외환은행본관이다. 나이제리아의 도자기 센터의 설계를 했으며, 나이제리아 대통령으로부터 현지에 와서 집행을 도와 달라는 친서가 왔다. 갈 수 없다는 사유를 써 보냈더니, 다시금 박대통령에게 현지에 올 수 있도록 조치해달라는 요청을 해왔으며, 대사관에서는 관용복수여권이 준비됐다고 알려 왔다. 현지에 3개월 머물면서 모든 일을 순조롭게 출발시켜 주고 주불 미국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았다. 놀랍게도 패스포트 기한의 배가 넘는 5년이었다. 사유인즉 하바드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추천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전해에 일본 와세다대학교 공대학장인 요시자까 다까마사가 그 일로 파리에 와서 솔탄 원장의 의사를 전했는데, 패스포트가 무효이기에 도저히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던 일이 있었다. 그 자리는 꾸준히 르 꼬르뷔지에 선생의 수제자들이 이어 왔으니 말이다.

1975-1978
1975년 도미하게 되고, 1976년부터 로드아일랜드 미술대학의 4차원 교수로 취임한다. 이곳에서 사귄 귀재 데이비드 브릿슨에게 사사한 집사람은 1년 후에 그곳 교수들을 깜짝 놀라게 한 추상화가가 되었고, 나도 프로비덴스와 보스턴을 드나들며 하바드 미술대학원 객원교수로서의 바쁜 생활이 지속되었다. 프로비덴스의 거부인 중국계 4세 로버트 따우와 가깝게 사귀어, 그곳에 김중업건축연구소 국제본부를 두었다. 보스턴 오리엔탈 아트센터, 로드 아일랜드 주청사 등의 구상을 하게 된다. 백남준, 존 베르, 김차섭 등과 사귄다.
1978년 나이제리아의 대통령 여동생의 요청으로 이븐 올루아 스포츠 호텔의 구상을 한다. 무척도 좋아하고 세우고 싶어 했으나, 나이라라는 그곳 화폐로밖에 지불이 불가능하며, 또 그곳에 사무소를 꾸리고 연중 9개월은 있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포기하고 만다. 하루바삐 되돌아가고 싶은 조국이 있고, 미국조차 내 비위에 맞질 않고 외국 학생들만을 가르친다는 것도 염증이 나는 판에, 5년이라는 세월을 아프리카에 파묻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979-
1979년 드디어 귀국할 시기가 온 것이다. 귀국한 나에게 9년이란 공백은 많은 것을 낯설게 했다. 더욱이 시골은 쑥밭이 되고 강남뿐만 아니라 모든 시골도시들도 획일화되어 버렸기에 숨통을 터야 한다고 깊이 느꼈다. 1980년 바다호텔, 하늘교회(민족대성전)의 아이디어를 날렸다. 무엇인가 보람 있는 일들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극도의 불경기였다. 한국교육개발원 신관, 아나백화점, 수퍼마켓 「태양의 집」, 한남동 이강홍씨집, 방배동 정교수댁, 육군박물관, 부산시 충혼탑, 진주문화회관, 을지로 17지구재개발, 예술의 전당 등 뜻이 맞는 제자들과 열심히 심혈을 기울여가며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뜀박질을 했으며, 지금도 나는 그 뜀박질을 멈추지 않는다.

계열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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