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자 Creator

0023, 배기형

분류번호
0023

이름
배기형 (裵基瀅)

생년월일
1918년 1월 23일

출생지
경남 김해군 김해읍 답곡리

1935.03. 부산공립공업고등학교 건축과 제3학년 졸업
1936.04. 복강福岡현립공업학교 건축과 제3학년 편입학
1937.10. 복강福岡현립공업학교 건축과 제4학년 졸업
1938.05. 구대九大임시고등건축강습소 입소
1939.03. 구대九大임시고등건축강습소 졸업

 

 

1939.05. 복강福岡시 서도西島건축사무소 입소
1942.08. 복강福岡시 서도西島건축사무소 재직 중 팔번八幡제철소 및
주식회사 소화昭和제강소 건축촉탁 피명被命
1945.08. 종전 귀국
1945.10. 명 부산제일공립공업학교 건축과 강사
1946.01. 구조사건축연구소 창립, 부산
1953.11. 사무소 이전, 서울 서소문동
1955.04. 신건축문화연구소 공동설립(정인국, 엄덕문, 김희춘, 함성권, 김창집, 배기형, 이상 6인
1957.02. 한국건축작가협회 창립
창립일원: 이천승, 정인국, 김희춘, 김태식, 배기형, 강명구, 엄덕문 김정수, 박학재, 김중업, 홍순오, 나상진, 이희태, 이명휘 이상 14인. 초대회장: 이천승 사업위원: 배기형
1957.04. 신건축문화연구소 해체
1957.10. 주식회사 구조사-건축기술연구소 재창립, 서울
1958.05. 한국흥업은행 건축촉탁 피명
1959.12. 제일모직공업주식회사 건축촉탁 피명
1959.12. 사단법인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피선
1965.03. 한국건축가협회 부회장 피선
1965.07. 제1회 건설부장관 1급 건축사 자격면허 취득
1968.03. 사단법인 한국건축가협회장 피선(6대)
1969.10. 세계건축가총회 참석(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1970.01. 한국건축가협회 회장 사임, 명예이사 취임
1973-75, 1977.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1979. 배기형, 주식회사 구조사-건축기술연구소 대표이사 퇴임
1979.08. 배기형, 한림건축기술연구소 개소
1979.10.17. 작고

 

「배기형과 구조사」아카이브는 목천건축아카이브가 배기형과 구조사가 생산한 매우 다량의 도면과 관련 자료를 소장하게 된 것에 있다. 2016년 9월 5일에 「주식회사 구조사 종합건축사무소」로부터 위에 적은 도면과 관련 자료를 기증받았다. 이후 이 도면과 관련 자료에 대한 보존 처리와 분류 방식에 대한 자문을 얻었고, 2016년 11월부터 2017년 11월까지 1년 이상에 걸쳐서 도면과 관련 자료의 분류와 확인의 작업을 진행하였다. 한편으로 분류와 확인이 끝난 도면과 자료에 대해서는 2017년 9월과 11월의 사이에 보존처리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에서 목천건축아카이브의 운영위원회가 자문을 맡았고, 그 구체적인 실무는 사무국이 담당하였다.

한국근현대건축사는 배기형에 대하여 그다지 기술하고 있지 못하다. 예외적으로 배기형에 주목한 원정수는 배기형에 관한 4편의 연재물을 『건축사』 1997년 10월호에서 1998년 1월호까지에 기고하면서 그 시작을, “한국의 근대 건축역사에서 건축계가 기억해야 할 훌륭한 건축가 가운데 배기형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라는 문장으로 삼았었다. 원정수는 윤일주가 배기형의 작품 중에서 「공군사관학교 도서관」(1958), 「한일은행 을지로 지점」(1962), 「중앙빌딩」(1965), 「유네스코 빌딩」(1966)과 같이 네 개의 작품만을 꼽고 있는데 이의를 제기하였다. 원정수는 윤일주가 배기형의 공장 및 구조물 건축에 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나섰던 것이었다.

배기형이 한국근현대건축사에서 저평가된 이유는, 첫째로 그가 “고난도의 철골구조 상세도의 작도솜씨”에 능했다는 말과 같이 공장 및 구조물에서 빼어났기 때문일 것이며, 둘째로 「신건축문화연구소」의 여섯 구성원 가운데 “대학교수를 겸직하지 않고 언제나 제도판에 몰두하고 있는 건축가는 배기형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두 가지 이유는 한국근현대건축사에서 배기형이 차지하는 독특한위상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이제까지 한국근현대건축사는 배기형과 같은 “철골구조설계의 달인”이라든지 “구조전문 건축가”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등한시해왔다. 도리어 그 서술은 “양식”, “전통”, “공간”, “마당”과 같은 명제나 담론에 치중해온 경향이 크다. 임화(林和)의 「이식문학론」이 발표된 것이 1940년의 일인데도, 한국근현대건축을 박래품(舶來品)으로서만, 서양근현대건축 이론서의 잣대를 통해서만, 파악하려고 하는 경향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 주요대학 건축(공)학과의 졸업생들은 각기 해당 학과의 초창기 건축학 교수들의 자료 구축에 힘써 왔기에, 대학교수를 겸직하지 못한 배기형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은 도리어 당연하다고도 할 것이다.

배기형(1918-1979)의 일생은 박정희(1918-1979)의 일생과, 한 달 반의 차이를 가질 뿐으로, 거의 중복된다. 배기형은 1935년 3월에 부산공립직업학교를 졸업한 뒤에 일본의 큐슈(九州)로 건너가서 건축학교와 건축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후쿠오카(福岡)의 건축학교들과 야하타(八幡) 제철소 등의 경험을 배경으로 그는 해방이후 산업화에 접어든 한국에서 최고의 “구조설계전문가”, “디테일러(detailer)”로 자리를 잡아 갔다. 그래서 건축사무소의 명칭마저도 「구조사(構造社)」인 것이다. 이렇게 한국의 근대화를 온몸으로 체현한 건축가가 배기형 이외에는 달리 없을 것만 같다.

원정수는 배기형의 작품시기를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었다. 전기는 1947년부터 1958년까지이고, 중기는 1958년부터 1965년까지이며, 후기는 1965년부터 1975년까지라는 것이다. 전기에서 그는 「대한중공업 인천공장」(1953, 1954), 「제일제당 부산공장」(1953), 「제일모직 대구공장」(1954)와 같이 공장 및 특수구조에서 빛을 발하였고, 1954년에서 1957년까지 「신건축문화연구소」의 구성원으로 김희춘, 정인국, 엄덕문, 김창집, 함성권과 연대를 모색하였었다. 중기에서그는 「유네스코회관 현상설계」(1959)의 1등 당선을 계기로 공장 및 특수구조를 넘어서 “빌딩, 은행, 극장, 학교, 주택 등의 새로운 건축창작품”의 창출로 나아갔다. 중기의 대표작은 「한국전력 영월 제2화력발전소」(1962)였다고 평가된다. 중기는 박학재의 일시참여로 시작하여 「건축사법」의 시행(1965)과 김창서의 사직(1966)으로 끝을 맺었다. 김창서는 1955년부터 10년간 “배기형의 분신같은 설계실력을 갖”추고 “오로지 설계 해결의 연구와 설계도의 질적 내실을 만들어 나가는 책임감”으로 구조사를 지탱했었다. 후기에서 그는 1968년에 한국건축가협회의 회장을 역임하였고, 1970년에 한국건업의 건설기술연구소에 관여하였다. 1976년에 구조사를 조카인 윤홍갑에게 “물려주고”난 후에는 아키반의 구성원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배기형의 전성기는 중기에 놓이고 이때 많은 작품을 왕성하게 생산하였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가장 절실히 필요했었던 건축가가 「건축사법」(1965)의 제정이라는 건축의 제도화 과정이나 건축설계사무소의 대형화 과정에 능동적으로 적응하지 못하여 쇠락해 간 것은 한국근현대건축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건축가협회의 회장을 역임한 분이 옥인동의 공동목욕탕을 구입하여 개조한 뒤에 그곳에서 종생(終生)한 사정이나 재계의 거물들을 건축주로 두었으면서도 술값을 계산할 때의 말버릇에 관한 일화 등에서 배기형의 경제관념을 엿볼 수가 있다. 이러한 생활관(生活觀)은 “현실성”, “합리성”, “실용성”을 중시했다는 그의 건축관(建築觀)과도 관련이 있을 법하다. 이로써 그가 “구조역학적 면을 대단히 중요하게 챙겼다”는 증언과 “설계도면은 기술적 요구의 표현이지만 도면자체가 아름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미건조하게 보이는 철골구조 도면이라 할지라도 윤택한 느낌이 흘러야 한다고 주장한 일이 있었다”와 같은 그에 대한 평가가, 이 「배기형과 구조사의 아카이브」를 통해서 확인되기를 기대해마지 않는다. 김일진의 증언에 따르면, “배선생은 열심히 하고, 책임감이 강하고, 재주 부리지를 않고, 거짓말은 못하는 건축가로 단정 지을 수 있다.”

아울러 「배기형과 구조사의 아카이브」를 통해서 그와 동시대의 건축가들과 구조가들의 족적과 그의 사무소에서 건축가의 초년(初年)을 보내며 건축을 입지(立志)했었던 직원들의 행적이 더욱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목천건축아카이브는 한국근현대건축사의 풍성한 서술을 위하여 여러 가지 구술채록사업과 자료수집에 힘을 기울여왔다. 이 『배기형과 구조사』아카이브는 그와 같은 노력의 연속선에 놓이면서도, 자료의 질과 양에 있어서는 이제까지의 모든 노력의 총합보다도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높은 명성에 비하여 아카이브가 빈약한 여러 건축가들에 비하여, 낮은 명성에다가 다소 불우한 말년을 맞이했던 배기형이 이토록 엄청난 아카이브를 갖게 되는 것은 역사의 간지(奸智)인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2017년 12월 우동선

본 글은 2017년에 발간한 목천건축아카이브 목록집 「배기형과 구조사 아카이브 목록 1, 설계도서 편」에서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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