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물 Publication

한국현대건축의 기록

서상우 구술집

목천건축아카이브 한국현대건축의 기록8

서상우 구술집

채록연구 | 전봉희, 우동선, 최원준

진행 | 목천건축아카이브

출판 | 마티, 2018-10-30

246쪽 ㅣ 170X230mm ㅣ ISBN 979–11–86000–73–1 04600

살아 있는 역사, 현대건축가 구술집 시리즈를 시작하며

서상우 구술집을 펴내며 

1. 유년기에서 대학 시절까지

2. 엄덕문건축연구소, 동화건축 및 홍익공전과 중앙대 시절: 건축가로서의 활동

3. 국민대학교 시절: 교육자로서의 활동

4. 뮤지엄 관련 계획

5. 프레리 하우스

6. 구술집을 마무리하며

작업 스케치

약력
주요 작품
수상 경력
저서

목천건축아카이브에 의한 건축가 구술채록작업이 시작한지 벌써 햇수로는 8년이 되었고, 이번에 출간하는 서상우 선생의 구술채록집도 호수로 8호가 된다. 중간에 4.3.그룹을 대상으로 한 3호와 원정수와 지순 부부 건축가를 상대로 한 5호가 있어서 대상으로 한 건축가의 수는 열을 넘었으니 이제 적지 않은 시간과 이력이 쌓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사이 우리와 비슷한 구술채록 작업이 다른 곳에서도 진행되기도 하고,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서울역사박물관 같은 기관에서 건축가의 작품과 활동을 다루는 전시회가 빈번히 개최되기도 하여, 우리나라 현대 건축사를 둘러싼 환경이 크게 변하였음을 실감한다.

구술채록 작업은 가능한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생생하게 기록하여 후대에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비장(祕藏)의 역사라고 할 수 있지만, 수많은 건축가들 가운데 누구를 대상으로 할 것인가를 선정한다는 점에서 이미 보감(寶鑑)의 역사이기도 하다. 더욱이 구술과 채록의 전 과정은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하는 구술자와 묻고 싶은 것을 묻는 채록자 사이의 상호 작용에 의하여 진행되므로, 구술채록 그 자체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事實)이기 보단 이미 기록된 사실(史實)에 가까울 것이다.

서상우 선생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전의 대상자와 차별성을 갖는다. 연배로는 1937년생으로 윤승중 선생과 동갑이지만, 도중에 전쟁과 군입대 등으로 대학은 1963년에 졸업하게 되니 이제까지의 구술 대상자 가운데 가장 늦다. 또 서상우 선생은 홍익대학에서 수학한 첫 번째 구술 대상자가 된다. 홍익대학의 건축미술과 개설이 1954년의 일로 서울대학에 비해 8년 늦으니 크게 어색한 일은 아니지만 앞으로 좀 더 균형을 잡아나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상우 선생은 꾸준히 많은 건축설계 작품을 남겼지만, 28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교육에 투신하여 평생을 건축교육에 헌신한 건축교육가이자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주요 박물관 건립에 주도적으로 관여한 박물관건축프로그램의 전문가라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서상우 선생의 전문가로서의 활동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전반부는 홍익공전과 중앙대학, 국민대학 등에서 설계를 중심으로 한 건축교육에 주력하면서 동시에 외부와 협력하여 활발한 설계 작업을 하던 시기이고, 후반부는 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문화시설에 대한 연구와 저술, 그리고 학회활동에 주력한 시기로 볼 수 있다. 1988년에 완성한 현대의 박물관 건축에 관한 박사학위논문에서 시작하여, 그 내용을 보완하여 1995년 3권의 박물관 건축 총서를 발간하고, 1997년에 박물관건축학회를 발족할 때까지 그의 50대에 해당하는 10년간은 그 이행기로 볼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올림픽을 유치한 1980년대 초부터 이후 IMF 경제 위기를 맞이한 1990년대 말까지의 한국 사회는 준비 없이 빗장이 풀린 세계화, 국제화의 명과 암을 모두 경험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상황 논리에 기반한 한국적 기준과 논리는 설 자리를 잃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 기준이 빠르고 강압적으로 이입되기 시작하였다. 건축 시장에서도 보다 전문적이고 세분화된 업역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건축 교육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교당 겨우 대여섯의 교수가 건축의 전 분야를 종합적으로 교육하던 것이 1980년대까지의 상황이고, 1990년대를 거치면서 교수의 수는 두 배 이상 증가하고, 그만큼 가르치는 분야는 전문화되어 갔다.

서상우 선생은 이 과정에서 보편적 기준에 따른 전문화의 방편으로 자신의 영역을 박물관 건축 프로그래밍으로 특화해나갔다고 볼 수 있다. 즉, 전반기의 서상우 선생이 총합적인 건축인, 보다 구체적으로는 설계와 교육을 양손에 나눠 쥔 건축과 교수의 한 시대상을 충실히 대변하고 있다면, 후반기의 서상우 선생은 전반적으로 개방되고 팽창하는 건축 시장 속에서 자신의 영역을 특화해 전문 영역을 구축해나가는 전문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 가지의 이미지는 20세기말을 관통하면서 우리 건축계가 겪는 일반적인 모습이며, 이 과정에서 많은 인물들이 뜨고 지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렇다면 개인 서상우는 어떻게 이 전환기를 부드럽게 통과하여 두 가지의 면모를 모두 가질 수 있었을까? 박물관 건축을 전공으로 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우연하게, 혹은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이광노 선생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고 겸손하게 토로하고 있지만, 세상일에 준비 없는 결과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구술 채록을 진행해오면서 필자가 느낀 바를 토로하자면, 이와 같은 성공적인 변신의 열쇠는,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부지런함과 헌신이라는 개인적 덕성에서 찾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전쟁으로 인하여 동년배들보다 2년 늦게 학교를 다녀야했고, 또 피난 간 형들을 대신하여 가장의 역할을 담당해야했던 청소년기의 경험은 조직과 리더십에 대한 감수성을 일찍부터 키워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급우들 사이에서는 반장이 되고, 교수들 사이에서는 앵커맨이 되며, 동문들 사이에선 총무가 되고, 관련 학자들을 모아 학회의 창립 회장을 하는 영원한 리더로서의 생애는 능력의 차원보다는 덕성의 차원에서 볼 때 더 자연스럽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서상우 선생의 구술을 준비하면서 기대가 컸던 부분은 그간 진행하여온 서울대학 출신들에게서 보지 못하였던 새로운 시각이었다. 하나의 입방체에도 여러 면이 있듯, 같은 시대를 거쳐 온 사람들일지라도 그 각각의 지나온 행로에 따라 서로 다른 면을 조망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실제로 서상우 선생은 홍익대학의 초기 건축 교육에 대하여, 그리고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건축 대학들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한 구체적이고 다양한 경험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조금 늦게 출발하였지만 홍익대학은 미술대학의 전통 속에서 건축의 예술적인 측면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교육 방식을 택하였고, 이는 김중업과 김수근 등 유명 건축가를 교수진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은 물론 조각과 회화 등에서 최고 수준의 미술가들을 바로 옆에 모시고 친밀하게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서상우 선생이 박물관으로 전문 영역을 찾아나가는 것도 이러한 홍익대학의 분위기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또한 아직 장안에 많은 대학이 있지 않던 시기이므로, 서상우 선생은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서울대학과 한양대학, 그리고 을지로와 명동을 중심으로 한 설계사무소 등에서 많은 당대의 건축인과 교류할 수 있었고, 이 부분에 대한 증언 역시 가치가 있다.

특히 김수근 선생과의 인연은 깊어서, 서상우 선생이 국민대학에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되었으며, 국민대학의 학풍을 만들어 가는데도 협력이 있었다. 그러나 선생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고 또 존경하는 분은 역시 정인국 선생이라고 자술하고 있다. 정인국 선생이야말로 뛰어난 설계 작업을 하면서도 한국의 근현대 건축에 대한 중요한 저작을 남겼으며, 또 건축 교육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분이니 만큼 서상우 선생의 행적을 견주어 보는데 빠지는 부분이 없다. 구술 작업을 준비하고 있던 2016년 가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정인국 탄생 백주년을 기리는 전시 겸 심포지엄이 열렸는데, 이것을 기획하는 데도 서상우 선생이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서상우 선생을 대상자로 마음에 두고 접촉을 시작한 것은 2016년의 일이나 실제로 구술채록 작업이 진행된 것은 2017년 5월부터 10월까지의 6개월간이다. 이처럼 늦어진 데는 여러 가지의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은 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앞서 언급한 정인국 선생의 행사도 있고 또 저술과 관련된 개인적 일정이 잡혀있어서 이를 조정하면서 빚어진 결과이다. 매번 겪는 일지만 처음의 한두 번의 구술 채록 과정에서는 구술자와 채록자 사이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어 매끄럽게 진행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채록자들을 당황케 한 것은, 첫 번째 만남 때 선생이 전체의 구술 내용에 대한 장별 구성과 제목을 정해 오신 일이다. 매사에 준비성이 철저한 선생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지만, 채록하는 입장에서는 이처럼 구술자의 의도가 강하게 드러나면 구술채록이 갖는 다소 거칠지만 역동적인 생생함보다는 탄탄한 구성이 우선되는 저술과 차별성이 적어질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억지로 질문을 만들어내어 보완하려 하였다.

이후 구술 채록을 거듭하면서 상호간의 신뢰가 형성되면서 초기의 일방향적인 작업이 쌍방향적인 것으로 바뀌고 마지막 회에 가서는 선생의 자택인 프레리하우스를 방문하여 격의 없이 여러 가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구술한 작업은 재단의 김태형 연구원이 일차 전사를 하고, 이를 김미현 국장과 전봉희, 우동선 등이 순차적으로 윤독하며 교정하였다. 이렇게 일차 교정된 원고를 바탕으로 다시 각주와 도판을 찾아 넣고 검토하는 과정을 반복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서울대학의 박사과정생인 성나연과 김태형, 그리고 담당 운영위원들이 다시 수고하였다. 도서출판 마티의 편집과 워크룸의 디자인을 거친 가본이 나온 것이 지난여름의 일이고, 마지막 검토는 주로 오탈자의 교정과 도판의 레이아웃 등에 한정되었다. 이 과정에 참여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무엇보다 구술 작업 내내 예의 열정으로 임하신 서상우 선생께 감사와 축하의 인사를 함께 전하고 싶다.

2018년 11월
공동 채록자를 대표하여
전봉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