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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건축아카이브 한국현대건축의 기록11
김석윤 구술집
채록연구 | 우동선, 전봉희, 최원준
진행 | 목천건축아카이브
출판 | 마티, 2024-11-25
342쪽 ㅣ 170X230mm ㅣ ISBN 979-11-90853-59-0
살아 있는 역사, 현대건축가 구술집 시리즈를 시작하며
『김석윤 구술집』을 펴내며
1 유년기에서 대학 시절까지
2 답사 현장에서-1
<제주한라도서관>(2008)
<제주도시자 관사>(1983)
<제주시립 탐라도서관>(1989)
3 서울건축학교(SA) 제주 워크숍과 제주문화포럼
4 답사 현장에서-2
<제주도의 와가 김석윤 가옥>(1913)
<제주 현대미술관>(2006)
5 제주 민가 연구
<김승택 씨 주택>(1984)
6 건축 단체 활동
7 제주도 관광개발계획
8 답사현장에서-3
<신제주 성당>(1993)
<제주 YMCA회관>(2002)
<제주 웰컴센터(현 제주관광정보센터)>(2009)
<김한주 씨 주택>(1985)
<고 씨 주택>(1982)
9 프로젝트 리뷰-1
10 답사 현장에서-4
<제주컨트리클럽하우스 내 교회>(2001)
<제주도 지방공무원 교육원>(1989)
<제주대학교 박물관>(2008)
<양 씨 다가구주택>(1996)
<김승택 씨 주택>(1984)
제주 동문백화점 및 동양시장, <제주 노인복지회관>(1991)
11 프로젝트 리뷰-2
12 제주도 건축
약력
수상 경력 및 주요 작품
찾아보기
이 책은 건축가 김석윤 선생님의 구술집입니다. 저는 2022년 7월 15일에 아우리가 제주문학관에서 개최한 ‘제주특별자치도 건축자산 진흥 정책 추진 현황과 과제’라는 긴 제목의 심포지엄에 갔다가 김석윤 선생님을 다시 뵙고 구술집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상경하자마자 이 생각을 목천문화재단 측에게 말씀드렸고, 처음부터 전봉희 교수님의 참여를 구하고 또 ‘제5차 구술’에서부터 최원준 교수님의 지원을 얻어서 8차에 걸쳐서 구술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제1차, 제2차, 제5차, 제6차, 제7차를 제주의 선생님 사무소에서 집중하여 진행하였고, 제3차와 제4차를 서울의 목천문화재단에서, 제8차를 총괄하는 의미에서 초심을 되짚어서 금성건축에서 진행하였습니다. 올해 1월 하순에는 선생님의 사무소에 도면을 찾으러 갔다가 폭설로 모든 교통이 막혀서 제주도가 섬이라는 사실을 새삼 체험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석윤 선생님을 제가 뵙게 된 것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2001년에 부임해서 몇 년 지나지 않은 때부터라고 기억합니다. 김석윤 선생님은 저희 건축과의 민현식 교수님과 교분이 오래되었고, 민 교수님 등은 「제주특별자치도 경관 및 관리 계획 수립 용역」(2007-2009)에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제가 제주도에 갈 때마다 김석윤 선생님이 마치 영화 ‘대부’의 주인공처럼 나타나셨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이 과묵한 편이신데다가, 저보다 20년 연상이셔서 그동안에 선생님과 제가 대화를 나누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말씀을 듣게 된 것은, 비로소 이번의 구술 작업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결과물을 독자들과 나눌 수 있게 되어서 감개무량합니다.
김석윤 선생님은 1945년에 제주에서 출생하여 1963년에 전남대학교에 입학하고 이듬해에 홍익대학교로 편입하여 1967년에 졸업했습니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ROTC 공병장교로 병역을 마친 뒤에, 1971년까지 금성건축에서 실무를 익혔습니다. 올해 들어서 금성건축의 도면들이 정리되는 와중에 김석윤 선생님이 작성한 11점의 투시도를 확인하였고, 다행스럽게도 이 구술집에 급히 넣을 수가 있었습니다.
홍대 출신의 빼어난 ‘투시도쟁이’로 명성을 얻었다가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제주도의 세기건설 근무로 낙향하였고, 1974년 3월에 ‘김석윤건축사사무소’를 개소하였고 2002년에 ‘김건축사사무소’로 개명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약칭 ‘김건축’은 부르기도 듣기도 좋아서 작명을 잘한 것 같습니다.
위에서 이미 ‘상경’, ‘낙향’과 같은 서울 중심의 단어를 썼는데, 이와 관련하여 서문을 준비하다가,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10년 초가을에 쓴 편지인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계[示二兒家誡]’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찾았습니다. 발췌해서 인용하면 이러합니다.
“중국은 문명(文明)이 풍속을 이루어서 비록 궁벽한 시골이나 먼 변두리에 살더라도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는데 무방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도성 문에서 수십 리만 떨어져도 이미 미개한 곳이니, 더구나 먼 지방은 말해 무엇하겠느냐. (중략) 만약 벼슬길이 끊기게 되면 빨리 속히 서울에 거처해서 문화(文華)의 안목을 잃지 말아야 한다. 나는 지금 죄인의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기에 너희들을 우선 시골집에 은둔하게 하였지만, 후일의 계책을 말하자면 적어도 서울의 10리 안에 거처할 생각이다.”
한국건축역사학회가 주최한 9월 21일의 「금성건축 아카이브 1957-1983: 기록을 통한 담론의 확장」 세미나 뒤에 이 얘기를 여쭙자, 선생님은 ‘나는 고향이니까, 집이 거기니까’라고 간단히 답하였습니다.
저는 정약용 선생의 이 ‘서울 사수’ 주장을 읽고서는 곧바로 제주시의 ‘연북정(戀北亭)’을 떠올렸습니다. 연북정은 이름 그대로 북쪽을 그리워하는 정자인데, 북쪽은 바로 서울이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제주도에 유배를 간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쪽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 ‘연북정’인 것입니다. 이 정자는 1590년에 조천관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쌍벽정이라고 하였다가 1599년에 건물을 보수하면서 연북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합니다. 14자의 축대 위에 정자를 지어서 멀리까지 조망할 수가 있습니다. 연북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전후 좌우퇴의 평면에 구조는 7량으로, 기둥의 배열과 가구의 배열 방법이 모두 제주도의 주택과 비슷하며 지붕은 합각지붕으로 물매가 낮은 것이 특징입니다. 저는 연북정이 16세기 말 이래로 지금까지 제주도의 정체성이나 지역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주도의 정체성이나 지역성은 항상 서울과 연동합니다. 이것은 김석윤 선생님이 제주도에서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서울의 대학원에 등록하고 몇 년 동안 거의 매주 서울을 왕복한 일에서 잘 드러납니다. 한편으로는 제주도를 탐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서울의 동향을 주시합니다. 선생님은 제주도라는 지리적, 교통적 이점을 살려서 일본 건축의 동향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 구술집의 주안점은 바로 김석윤 선생님의 평생 과제인 ‘제주 건축의 정체성의 파악과 표현’을 살피는데 두었고, 구술 과정에서 ‘제주에서 바라본 서울의 건축계’가 간간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구술집은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제주도 건축 동향을 말하면서도, 그 기간 서울의 건축 동향을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전라도 구례에서 살면서 구한말 서울의 정세를 기록한 매천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1864-1910)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김용미 제주특별자치도 총괄건축가는 『나는 제주 건축가다』(2021)에서 김석윤 선생님 세대의 제주 건축가들의 작업을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이전 세대들은, 제주의 정체성을 보전하기 위해 사라져가는 제주의 전통가옥과 마을을 조사하여 기록을 남기려고 노력했다. 또한 새로 짓는 건축에 제주 전통가옥의 안거리 밖거리, 올레의 공간적 특징을 담거나 제주도에만 있는 재료인 돌과 송이를 벽과 지붕의 마감재로 사용함으로써 제주 건축의 정체성을 담으려 했다. 1970~1980년대 제주의 건축이 그나마 지역적 특색을 갖게 된 것은 이들의 지역성에 대한 성찰과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가에서 나타나는 제주 건축가들의 이중적 과제인 ‘조사와 기록’과 ‘정체성 표현’을 온몸으로 평생에 걸쳐 껴안은 화신(化身)이 바로 김석윤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석윤 선생님은, 「제주도 주택의 의장적 특성에 관한 연구 (조선후기 와가를 중심으로)」(1986)를 석사학위 논문으로 작성하였고, 이를 토대로 「제주건축의 향토성 개념정립과 보급확대방안 연구」(1987)를 공동으로 발표하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연구들의 중심에 김석윤 선생님의 생가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김석윤 선생님이 1971년에 귀향한 이유로 ‘나는 고향이니까, 집이 거기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이 생가는 그냥 집이 아니라 빼어난 집입니다. 『김석윤 가옥 수리 보고서』(2010)는, 이 집의 창건이 선생님의 조부 대인 “1914년”이고 “기와는 제주목안의 향교에 쓰였던 것이라 전하고 재목들은 제주산의 잡목을 사용하고 있는데 치목 솜씨가 뛰어나다”고 하였습니다. 이 집이 김석윤 선생님의 건축 활동의 근원이 되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이후에 「한일국제연구집회 역사환경문화보전과 목조건축」(1992)와 같은 한일 민가 연구교류회에 관여하였고, 「19세기 제주도 민가의 변용과 건축적 특성에 관한 연구」(1997)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였으며, 1999년의 건축문화의 해에는 『제주의 건축』(1999)과 「제주의 마을공간 조사 보고서 –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1999)를 공동으로 발표하였고, 현대건축에 대해서는 『제주체』(2014, 2021)를 공저로 내놓았습니다.
이렇게 학술활동을 통하여 제주 건축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편, 한국건축가협회, 제주문화포럼과 같은 단체를 통하여 제주 건축의 정체성을 계몽하고 경관을 지키는 활동과 해외 답사 등을 이어 나갔습니다. 또, 이 단체의 기관지와 신문 잡지에 상당한 숫자의 원고를 기고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제주 건축의 정체성에 관한 구절을 인용하면 이러합니다.
“한국문화에서 별종지역인 제주도의 모체건축은 ‘안팎거리 집’이다. 제주도 고문화의 도서성에 미루어 이 ‘안팎거리 집’ 주거형식의 건축이 한옥의 원형이라는 추정이 가능하고 또 그 인자 발굴이 가능하다. 다음은 이 안팎거리 집에서 탐색해낸 우세 건축인자들이다. 이 토속 건축어휘를 이 시대의 보편 건축어법으로 재해석해내는 작업이 곧 비판적 지역주의 건축을 실현하는 옳은 태도이고 독창적인 건축을 담보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이어서 우세 건축인자로서 내향성 집합, 작음, 옴팡, 음예(陰翳)와 유심(幽深), 절제를 각각 설명합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구술집으로 미루겠지만, 재해석의 결과들이 김석윤 선생님의 주택과 공공건축물이 될 것입니다.
『나는 제주 건축가다』(2021)는 제주 건축가들을 6세대로 구분하면서, 김석윤 선생님을 해방 전후 태어나서 제도권 교육을 받고 활동한 이들로 3세대에 넣습니다. 이 세대 분류는 시간의 길이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시간의 깊이와 작업의 양이나 밀도로 세대를 분류한다면, 김석윤 선생님은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작품을 제주도에서 작업하였기 때문에, 저는 제주 건축가들의 세대 구분은 김석윤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구술집에는 김석윤 선생님이 설계한 여러 채의 주택들과 공공건축물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들은 이제까지 언급한 정체성, 지역성, 제주다움 등과 관련하여, 거의 모두가 탐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만, 특히 구 제주도지사 공관이 흥미롭습니다.
서귀포 출신의 6세대 권정우 건축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주 출신 건축가로서 김석윤 소장만큼 제주의 지역성과 어울리는 건축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작업으로 만든 경우는 드물다. 그 과정 속에서 숙련된 생각과 내용이 점차 진화하여 현대건축물로서의 지역성 표현이라는 숙제를 고민한 흔적이 그의 작업에 드러난다. 외형 형태를 추구하는 1차원적 형태적 표현에서 벗어나 공간 자체 본질에서 제주 건축의 모습을 표현한 작업은 제주 저지리에 있는 ‘제주현대미술관’이라고 생각한다. 평양냉면처럼 서너 번 맛을 보아야 제맛을 아는 것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매력적인 건축물이란 생각이 든다.”
김석윤 선생님의 작업에서 지역성의 표현이 형태와 재료에서 공간으로 변화하는 것은, ‘탐라도서관’(1990)과 ‘한라도서관’(2004)의 비교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김석윤 선생님은 ‘탐라도서관’에 대해서는, “멀리서 보기에는 옛 이곳 제주의 마을 모습을 닮아보자. ‘송이벽돌’은 참 정감있는 재료이다. 구운 벽돌에 비하여 덜 화려해서 제주다웁다”라고 썼는데, ‘한라도서관’에 대해서는 “제주도의 지형특성에서 유별한 특성인 굼부리의 공간경험이 설계의 모티브였다”라고 적었습니다. 이렇게 제주의 마을 모습을 말하면서 송이 벽돌로 제주성을 표현하려는 시도에서 제주도의 굼부리라는 공간을 모티브로 삼는 방식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에는 환경보호를 위해서 송이의 채취가 제한된 것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만, 그사이에 서울건축학교가 1998년에 제주에서 ‘한국성-제주에서의 발견’이라는 건축캠프를 연 것도 작지 않게 작용했다고 합니다. 이 건축캠프는 앞에서 적은 민현식 선생님이나 「제주특별자치도 경관 및 관리 계획 수립 용역」으로 이어져 나갔습니다. 이 연구용역이 어려운 고비에 처할 때마다 김석윤 선생님이 해결해 주었다는 전언을 들었습니다.
길게 적지는 못합니다만, 제주도의 관광화와 도시화는 김석윤 선생님의 건축 활동에 가장 큰 배경이 됩니다. 1971년에 귀향한 이후에 크게 관련한 작업도 「제주관광종합개발계획 기본계획조사」(1974)이었습니다. 이후 전개되는 제주도의 급격한 개발은 건축 수요의 증가와 이어지고, 또 난개발로 인한 경관의 훼손은 정체성의 탐구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제주도의 정체성은 1990년대 초반까지 향토성이라고 말하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 지역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약 2년에 걸친 구술 작업이, 구상으로부터 치면 2년을 훌쩍 넘긴 구술 작업이, 마무리되어 한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됩니다. 이 책이 김석윤 선생님을 매개로 하여 제주 건축과 또 한국 건축의 논의에서 크게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고, 더 나아가서는 이 책이 현대건축에서 제주성이나 한국성을 논하는데 필수적인 자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구술 작업에 관련하고 이 구술집의 출간을 고대해 온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가장 먼저 김석윤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목천문화재단의 김정식 명예이사장님, 김미현 이사장님께 감사합니다. 구술 작업과 토론을 함께한 전봉희 교수님, 최원준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성실히 구술 작업을 도와준 김태형 연구원님과 김준철 연구원님에게 감사합니다. 장소와 도면 자료를 협력해 준 금성건축의 김용미 대표님과 오정은 소장님에게 감사합니다. 출판을 맡아준 마티의 박정현 편집장님에게 감사합니다. 현지에서 응원해 준 김태일 교수님과 권정우 소장님에게 감사합니다.
2024년 10월
공동체록자를 대표하여
우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