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천건축아카이브 한국현대건축의 기록9
유걸 구술집
채록연구 | 전봉희, 최원준, 조항만
진행 | 목천건축아카이브
출판 | 마티, 2020-12-20
400쪽 ㅣ 170X230mm ㅣ ISBN 979-11-90853-09-5
살아 있는 역사, 현대건축가 구술집 시리즈를 시작하며
『유걸 구술집』을 펴내며
1 가족과 성장기의 경험들
출생과 가족 / 한국전쟁의 경험 / 경기 중고등학교 시절/ 취미와 여행 경험 / 서울공대 진학
2 대학과 건축 초년 시절
공대 건축과 시절 / 무애건축 시절
3 1960년대 작업과 도미
김수근 연구소 시기의 작품들 / <정릉주택>(1969) / <정릉교회> 현상설계(1970) /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 『공간』과 김수근 / 60년대 말 / 결혼 / 도미 / 가족 / 덴버. 정착기 / RNL 디자인 시절
4 1970~1980년대 초 미국에서의 활동과 교훈
도미 전의 작업들 추가 / RNL에서의 초기 작업 / 한국과의 차이 / <성 제임스 천주교회> 설계 과정(1972~1973) / <덴버시 경찰서>(1974~1975) / <제너럴 인슈어런스 빌딩> / 주택 사업 / 김수근의 방문 / 미국에서 얻은 교훈
5 1980년대 중반 귀국과 초기 작업들
<서세옥 주택>(1986) / 주택 3제(1991) / 80-90년대 개인 작업 시기 / 열린 공간
6 1990년대 대형 프로젝트의 시작
고속철도 / <요코하마 터미널>과 <국립중앙박물관>(1995) 현상 / <명동 대성당 건축 설계경기>(1996) /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 개괄 / <밀알학교>(1995~1997) / <밀알학교 2차>(2002) / 밀알학교 3차>(2007~2008)
7 2000년대 전반기의 작업들
학교 강의 / 2000년대 프로젝트의 시작 / <벧엘교회(밀레니엄 커뮤니티 센터)>(1999~2005) / <배재대학교 프로젝트>(2002~2010) / 아이아크 파트너십 / <계산교회>(2005~2007)
8 2000년대 후반기의 작업들
<DDP>현상(2007) / 비정형 건축물 / <아산정책연구원>(2008~2009) / <서울시청>(2005~2012) / 주거 프로젝트 3건 / <아시아문화전당(ACC)> 현상(2005)
9 2010년 이후의 작업들
<다음 스페이스 닷 투>(2012~2013) / <제주 동문시장-플라잉 마켓> / <드래곤플라이 DMC 타워>(2009~2013) / <카이스트 시설>(2012~2013) / (2015) / <서울대학교 예술계 복합교육연구동>(2012~2015) / <페블 앤 버블>(2014) / 건축계 이야기와 건축관 / 마무리
목천건축아카이브가 2013년부터 진행해오고 있는 한국현대건축 구술채록 시리즈의 신간으로, 김정식 선생, 안영배 선생, 윤승중 선생, 4.3그룹, 원정수 선생과 지순 선생, 김태수 선생, 김종성 선생, 서상수 선생의 구술집에 이은 아홉 번째 출간이다. 예외적으로 1990년대 초의 그룹활동을 조명했던 네 번째 구술집을 제외한다면, 그간의 구술채록은 1930년대에 태어나 1960-90년대에 걸쳐 우리나라 고도 경제성장기의 건축을 견인했던 전후 현대건축 첫 세대의 증언을 담았다. 반면 유걸 선생은 1940년 생으로 출생이 조금 늦을 뿐 아니라 건축가로서 인생의 궤적이 꽤나 남달랐다. 대학졸업 후 사회초년생 시절은 앞선 구술자들과 어느 정도 활동영역이 유사하나 (특히 김수근 선생 문하의 시기는 윤승중 선생과 겹쳐 당대의 진술에 또 하나의 층을 더한다), 1970년 도미 이후의 행보는 확연히 다르다.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격변기인 1970-80년대를, 그리고 건축가로서 가장 활동적일 30-40대 시절을, 선생은 미국 콜로라도주의 주도인 덴버에 정착하여 지역 사무소인 RNL에서 프로젝트디자이너로 활동했으며 직접 작은 주택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1980년대 중반부터 <서세옥 주택> 등 몇몇 프로젝트를 맡기 시작하여 90년대에는 한국에도 작은 조직을 두고 두 나라를 오가며 활동하다가, 본격적인 상주는 2002년 경희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의 전임교수로 임용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2010년대 후반까지가 선생이 아이아크 조직을 기반으로 우리 건축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했던 시기이다. 50대만 돼도 설계가 아닌 경영으로 물러나곤 하는 우리 건축계의 일반 경향과 달리, 선생은 70대까지 현역건축가로서의 위치를 유지했다. <밀알학교>, <밀레니엄 커뮤니티 센터>, <서울시청>, <트라이볼> 등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배출되어, 1960년대에 독자적인 설계를 시작한 선생이지만 21세기 건축가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선생의 많은 작품들은 기존의 틀을 깨는 공간적 개방성과 조형성을 띠었으며, 과감한 구조적 표현 역시 우리 건축계에서는 낯선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서울시청>은 독특한 조형적·공간적 제안으로 우리 현대사에서 김수근의 부여박물관, 자하 하디드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더불어 건축계의 범위를 넘은 세간의 주목과 비평을 가장 광범위하게 이끌어낸 사례이다. ‘종로에 다시 담을 쳐본다. 북악에 고층건물을 세워본다’ 등 자연과 전통에 대한 급진적인 생각들 또한, 이에 대한 찬반의 문제를 떠나, 우리 사회의 문화적 기류 속에서 으레 받아들여지던 가치들에 대해 재고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차별화된 개인사와 활동시기, 작품 성향과 건축철학으로 유걸 선생의 구술은 지금까지 진행된 구술채록과는 다른 영역의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구술채록은 2019년 4월에서 11월까지 9회에 걸쳐 서울 양재동 아이아크 사무소, 내자동 목천재단 사무실, 삼성동 dmp 사무소에서 진행되었다. 목천 구술채록의 진행은 그간 운영위원들이 맡아왔지만, 이번에는 전봉희, 최원준 운영위원 외에 유걸 선생의 사무실에서 1999년부터 3년간 근무한 조항만 서울대 교수가 함께 참여하여 구술자의 기억을 보조하고 때때로 직원으로서의 시각을 더해주었다. 첫 구술세션에서 유걸 선생은 스스로 “공적인 영역이 참 없다”라는 말로 운을 뗐다. 외부와의 영향관계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작품활동을 해왔다는 말씀이었다. 건물, 도면, 사진, 글 등 기본적인 건축자료에 더해 건축가의 구술은 건축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양 방향으로 확장시켜주는데, 사회적·집단적 생산으로서 갖는 다양한 외부적 요인과 정황이 하나이며, 건축가라는 창조자의 개인사와 내면세계가 다른 하나다. 물리적 규모, 투입 자본, 사회적 영향력에 있어 건축은 여타 인공 생산물과 차별화되지만 최종적으로 창조자의 선택에 기반한다는 점은 마찬가지기에, 후자 역시 우리가 건축을 접근하는 중요한 단서며 유걸 선생의 이야기는 상당부분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지금까지 출간된 구술집을 보면 두 영역 중 한쪽으로 무게가 실려 있곤 한데, 이는 단지 구술의 방향이기보다는 구술자의 건축관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술집에서 개별 사건의 디테일뿐 아니라 구술이 외부와 개인 중 어느 곳을 향하는지 그 전반적인 지향을 파악하는 것도 건축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유걸 선생의 작품세계는 1960년대 말의 <정릉주택>에서 2013년에 완공된 <다음 스페이스 닷 투>까지 꽤나 놀라운 일관성을 보인다. 가급적 구획 없이 개방된 내부 공간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인상적인 구조 체계다. 유걸 선생 스스로는 “열린 공간과 구조의 표현”으로 자신의 건축을 정의한다. 하지만 이는 미스반데어로에의 건축을 정의하는 키워드들이기도 한데, 유걸 선생의 작품이 엄밀하고 명료한 질서와 극소주의적 표현체계를 통해 보편성을 지향하는 미스의 건축과는 전혀 다르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열림의 속성과 연원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자주 사용된 사선과 비정형의 체계는 끊임없이 틀을 깨고자 하고, 구조는 명쾌하게 합리적이기보다는 복잡다단하고 표현적이어, 선생의 작품은 질서를 완성하기보다는 생동의 과정을 지속시키고픈 것으로 읽힌다. 조화보다는 대비, 유사성보다는 차이, 동질성보다는 개별성을 도모하며 여기에 타고난 조형적 감각이 더해진 결과물들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공간적 경험을 선사하며 건축계에 다양성을 더해왔다.
구술과정을 통해, 이러한 건축의 근저에 자리한 것은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적 가치로 믿는 신념, 우리 사회의 집단성과 폐쇄성에 대한 반감, 그리고 새로움에 대한 지속적인 갈망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한과 경계를 넘은 자유의 도모는 매우 직접적인 방식으로 건축에 적용되었다. 영역 간 위계나 프로그램의 조정보다는 벽을 없애는 공간의 개방성으로 구현된 것이다. 개념과 건물의 연결 체제가 역설이나 반전 없이 단순명쾌하다는 점이 선생의 건축이 가진 특징이라 생각된다.
새로움에 대한 열망 역시 선생의 건축을 이끈 동력으로, 종심의 나이에 여전히 새로운 시도에 대한 호기심과 추진력을 잃지 않는 예는 세계 건축사에서도 매우 드문 것이다. (참고로 미스는 “나에게 새로움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건축의 구조와 공간, 시공법을 완전하게 새롭게 정의하고자 한 <RMT>와 같은 근작은 젊은이들의 작품과 비교해 봐도 그 도전적 실험성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급진적 상상을 현실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에는, 일찍이 학창시절부터 공터에 벽돌집을 쌓아만들 정도로 실제의 짓기에 관심이 있어왔고, 미국에서 주택을 서너 채 직접 시공하며 현장의 현실을 터득한 경력이 든든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유걸 선생에게 자유는 건축의 주제인 동시에 실천 형식이었다. 선생은 자신이 건축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바를 외적 제약이나 경직된 조직의 속박 없이 최소한의 인원과 협업체계로 현실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탐구한 건축가였다. 프리랜서, 대형사무소 혹은 건축가와의 일시적 협업, 프로젝트의 유무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유동적인 직원 조직, 셰어오피스 형식의 연합, 개별성을 인정해주는 파트너십 체제 등 선생의 다양한 실무적 시도들은 오늘날 변화하는 시장 상황 속에서 대안적인 설계업무방식을 모색하는 이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시한다.
유걸 선생의 스승인 김수근 선생 역시 1986년 이소자키 아라타와의 대담에서 자유에 대한 갈망을 언급한 바 있다. “국가의 건축”을 해야 했던 단게 겐조와 달리 제자인 이소자키는 이러한 부담감에서 해방되어 활동할 수 있었기에 그 자유가 더없이 부럽다고 했다. 우리의 경우에는 김수근 선생의 후속세대에서야 이러한 자유의 여지가 생겼으며, 이를 가장 앞서 적극적으로 도모한 이가 유걸 선생이라고 생각된다. 기억할 것은, 일반 예술가와는 달리 타인의 의뢰를 통해 작업을 하는 건축가에게, 자유는 그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여전히 쟁취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원고 검토를 함께 해준 목천재단의 김미현 국장, 전사, 각주 작업과 도판 배치를 진행한 김태형 연구원, 자료 입수에 도움을 준 아이아크의 민지희 씨, 그리고 디자인과 편집을 맡은 워크룸의 김형진 대표와 도서출판 마티의 박정현 편집장 등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된 이 구술집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자유 의지에 기반한 유걸 선생의 건축적 제안들이 철도역사, 학교, 교회, 관공서 등 우리의 주요 공공영역에서 선택받을 수 있었던 원동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매사에 삐딱하다고 자평하는 성격과 달리 온화하고 차분한 선생의 어조가 글로 전달되지 않는 점이 아쉬운데,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목천건축아카이브의 유투브 콘텐츠를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020년 12월
공동채록자를 대표하여
최원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