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천건축아카이브 한국현대건축의 기록6
김태수 구술집
채록연구 | 전봉희, 우동선, 최원준
진행 | 목천건축아카이브
출판 | 마티, 2015-02-19
326쪽 ㅣ 170X230mm ㅣ ISBN 979-11-86000-29-8
살아 있는 역사, 현대건축가 구술집 시리즈를 시작하며
『김태수 구술집』을 펴내며
1. 유년기에서 서울대 재학까지
2. 1960년대: 예일대 유학과 필립 존슨 사무소 근무
3. 1970-80년대의 활동: 국립현대미술관 외
4. 1980-90년대의 활동: 한국 사무실 작업 및 미국 교육시설 프로젝트
5. 1990년대 말 이후의 활동과 건축론
6. 한국건축계와의 교류 / 사무실의 파트너들
7. 한국 건축계 지원사업 / 가족이야기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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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과의 구술 채록 작업은 모두 7차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첫 번째 작업은 2014년 5월 10일 오후2시부터 5시까지 서울의 목천재단 사무국에서 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미국의 코네티컷 하트퍼드에 있는 선생의 사무실과 별장 등에서 같은 해 8월 21일부터 23일까지 3일간 오전, 오후로 나누어서 집중적으로 진행되었다. 책을 보면 알게 되겠지만, 첫 번째의 것은 구술자와 채록자 사이에 첫 만남이었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이야기에 혼선도 있고 집중력도 떨어졌다. 하지만 약 석 달 이후에 진행된 나머지 작업은 그 사이 구술자와 채록자 모두 작업에 대한 사전 준비가 있었고, 또 실제 구술자의 작품들이 있는 현장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훨씬 더 집중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사실 첫 번째 구술 작업이 다소 혼란스러웠던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고 다른 건축가들과의 작업에서도 마찬가지였기에 앞으로의 구술 작업에서 참고로 삼을만하다.
건축가 김태수는 1936년 12월 12일 만주 하얼빈에서 태어났다.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해방 전에 서울로 이주하였고, 재동국민학교와 경기중고등학교를 마친 후 1955년 서울대 건축공학과에 입학하면서 건축의 길에 들어선다. 앞서 재단에서 진행한 다른 건축가들의 경우를 보면, 안영배 선생이 1951년, 원정수 선생이 1953년, 김정식, 지순 선생이 1954년 같은 대학에 입학하여 선생보다 선배가 되고, 윤승중 선생이 한 해 후배이다. 그러니 이들은 모두 1932년부터 1937년 사이에 태어나, 1950년대에 건축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모두 다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점이 당대를 증언하는데 약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서울대학이 다른 대학보다 일찍 설립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사정도 감안하여야 한다.
김태수 선생은, 한국에서 대학교육을 받고 나서 대학원 과정으로 미국 유학을 간 첫 번째 사람이다. 선생에 앞서 한해 선배인 김종성 교수가 있지만, 그는 대학을 마치지 않고 학부 재학 중에 유학을 떠났다. 또 5년 위인 김수근 선생 역시 재학 중 일본으로 건너갔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해방 직후의 혼란기와 곧 이은 한국전쟁의 여파로 사회 각계에서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때는 1950년대 후반이다. 특히 해방 이후 건축교육을 이끌었던 첫 세대라 할 수 있는 김정수, 김희춘, 윤장섭, 이광노 교수 등은 모두 1950년대 후반 미국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고 돌아왔다. 김태수 선생은 짧지만 이들에게 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간 첫 졸업생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동시에 유학 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서 계속 활동한 첫 번째 한국인 건축가이기도 하다.
김태수 선생의 구술을 듣다보면, 당시의 국내외 건축 교육의 상황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특히 대학 1학년 때인 1955년, 서울대학의 역사에서는 유례가 다시없는 교수퇴진 운동을 벌인 일은 당시의 학생들의 포부와 건축교육의 실상 사이에 얼마나 큰 괴리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1956년 서울대학이 당시로서는 젊은 층에 속하였던 윤장섭, 이광노 두 교수를 영입하게 되는 것도 이 사건과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흥미로운 일은 선생이 접한 당시 미국의 건축교육에서도 보인다. 1961년 1월 선생은 예일대학의 건축학 석사과정에 입학을 하게 되는데, 예일대학에 건축학 석사과정이 생긴 것은 이보다 겨우 2년 앞선 1959년의 일이다. 1960년대는 미국의 건축교육이 1922년 코넬대학에서 시작한 5년제 학부 과정에서 벗어나 4+2년제의 석사 중심과정으로 바뀌던 시기였다. 예일 대학은 이 과정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초기에는 1년의 고급 과정으로 석사학위를 주었다. 선생이 입학할 당시 한국에서 받은 6년간의 학부 및 석사과정 교육에 대한 인증을 해주지 않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대학원 과정에 입학하기에 앞서 학부 4학년 과정을 수강하여야 했고, 이후 한 학기를 마친 후 면담을 통하여 진급이 결정되어, 1년 반 만에 예일 대학에서 건축학석사를 받을 수 있었다.
김태수 선생이 수학하던 시기는, 소위 근대건축의 거장들의 시기가 끝나고 건축계에 새로운 스타들이 등장하던 세대교체의 시기였다. 예일을 선택한 것은 루이스 칸에게 배울 요량이었는데, 입학 허가를 받고 군복무를 마치고나서 가보니 그사이 학장이 폴 루돌프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구술 과정에서 김태수 선생은 폴 루돌프에게서 큰 가르침을 받았다고 여러 차례 감사를 표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때 교수로는 필립 존슨, 제임스 스털링, 에로 사리넨, 빈센트 스컬리 등이 있었고, 함께 수학한 동급생으로는 학부 과정에서는 찰스 과스메이, 대학원 과정에서는 노먼 포스터, 리처드 로저스 등이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선생은 당시 영미 건축계의 가장 선진적인 분위기에서 최상의 교육 환경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인연은 졸업 후 필립 존슨의 사무실에서 수련을 쌓는 인연으로 이어지고, 이후 작업들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자기 일을 해나가는 밑거름이 된다. 도미 이후 선생의 작업은 대개 10년 단위로 구분해서 볼 수 있다. 즉 1960년대가 예일에서 교육을 받고, 뉴욕과 하트퍼드 등에서 실무 수련을 쌓은 시기라고 한다면, 1970년대는 하트퍼드에 정착하여 개업을 하고 공공 건축을 통해 자리를 잡아간 시기이고, 1980년대와 1990년대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가장 왕성하게 작업을 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시작이 1983년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현상 당선이라면, 마지막은 1999년의 튀니지 미국대사관의 설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의 작업은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건축가 김태수가 국가적인 건축가로 자리 잡는 계기와 증거가 된다. 1986년 미국 AIA의 펠로우로 선임되고, 1994년 KBS의 해외동포상을 수상하는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다양한 작업을 하였지만, 김태수 선생의 50여년에 걸친 작업의 중심에 있는 것은 역시 교육 시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6년의 스미스 스쿨은 건축가로서 안정된 클라이언트를 확보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작업이었고, 이후 고등학교, 대학교로 이어지는 많은 교육시설은 언제나 건축가 김태수 작업의 중심에 있었다. “합리주의”는 그의 건축 작업을 관통하는 이념이며, 기능성과 지속성은 양보하지 않는 가치가 되었다. 실제로 구술 작업 중 방문한 작품들에서 우리들은 지은 지 40년이 넘은 건물이 마치 작년에 지은 것처럼 잘 작동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수십 년에 걸쳐 같은 학교의 건물들을 지속적으로 지어나가며, 설계한 것의 80%가 실제로 지어졌다는 사실은 그의 작업이 얼마나 건축주들에게 환영 받는지를 잘 보여준다.
코네티컷 주의 여러 곳에 있는 선생의 작업들을 둘러보고 더욱 놀란 점은 그 작업들에서 보이는 일관되지만 진화하는 형태들이었다. “단순한 형태”를 선호하는 선생의 작업이 초기에는 상자의 조합 위주였다면, 후기로 가면 이에서 벗어나 조금 더 자유로운 곡선의 모습이 함께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것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즉, 초기에는 양보할 수 없는 기능적인 요구들과 기술적인 제한, 그리고 감성적 열망의 퍼즐을 최대한 단순한 형태로 풀었다면, 후기에는 그것들을 만족해가면서도 보다 대담한 형태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원숙함이 보이는 것이다.
선생은 요즘도 매일 실제로 연필을 들고 작업을 한다. 오전에 연필로 작업한 것은 오후에 직원들의 손에 의해 캐드 도면으로 작성되고, 다음 날에는 프린트된 도면 위에 다시 연필로 작업을 계속해나간다. 80세가 되도록 현장에서 작업을 할 수 있는 행운의 건축가가 얼마나 될까? 평생을 그저 쉬어본 일이 없다는 선생의 말이 허사가 아닌 것은 잦지 않은 귀국 여행 일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도미하여 졸업하여 취직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를 데리고 온 1969년의 첫 번째 귀국 시에는 서울마스터플랜을 책으로 만들어 가지고 와서 대내외에 발표했다. 그 후 13년 만에 다시 찾은 두 번째 귀국 때는 작품 사진들을 두루마리로 가지고 와 당시로선 드문 개인 건축전시회를 열었다.
이와 같은 귀국 시의 활동은 한편으로는 국내 건축계에 대한 부채감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즉, 재학 시절 충분한 건축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후배들에게 이어지지 않도록 무언가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미국에 머물면서도 공간 등의 국내 잡지에 지속적으로 글과 작품을 발표하게 하였다. 또, 어느 정도 사무실의 운영이 정착된 1990년부터는 젊은 건축가를 대상으로 해외의 선진 건축을 견학할 수 있는 트래블그랜트를 지원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고, 이에 더해 2001년부터는 서울대학에 외부인 설계 강사에 대한 지원금을 매년 1만 달러씩 보내고 있다. 한국 건축계에 대한 선생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 구술채록집의 발간은 때마침 열리는 현대미술관의 건축가 김태수 전시와 시일을 맞추었다. 2016년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 맞추어 개관한 현대미술관 과천관의 30주년이 되는 해이며, 건축가 개인으로는 만 80세를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기념이 되는 해이다. 구술을 진행하면서, 만일 1969년 실무수련을 마쳤을 때나, 1980년대 초 서울대학으로부터 교수직 제안을 받았을 때 김태수 선생이 귀국하여 한국에서 활동을 하였으면 어땠을까 상상을 해보곤 하였다. 첫 번째 귀국 때는 김수근 선생이 말렸다고 하고, 두 번째 귀국 때는 자발적으로 사양하였다고 한다. 어느 시기가 되었건 만일 그때 귀국하였다면 우리 건축계에는 도움이 되었겠지만, 건축가 개인에게는 마이너스가 되었을 것이라는 데에 채록자들이 생각이 일치하였다. 우리가 겪어온 건축계의 작업 환경이 아직도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채록된 테이프는, 전사자에 의하여 문서로 정리되고, 이후 구술자와 채록자의 검토와 함께 연구진들의 각주 작업과 편집 작업의 단계를 거쳤다. 전사에 수고한 김태형 연구원, 각주 작업을 한 김하나 박사, 그리고 구술자와 채록자의 중간에서 수정과 편집을 도맡아 한 김미현 국장에게 공을 돌리고 싶다. 아울러 이번에도 편집을 맡아 진행해준 박정현 편집장과 도서출판 마티 관계자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2016년 1월
공동채록자 전봉희, 우동선, 최원준을 대표하여
전봉희